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자 김인후의 시문집 하서선생전집
문묘(文廟)는 조선시대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지방의 향교(鄕校)에 세워진 공자의 사당을 말한다. 이 사당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공자의 제자, 우리나라 역대 명현(明賢)을 같이 모셨다. 신라의 설총, 최치원부터 조선 숙종 때 박세채에 이르기까지 모두 18명을 모셨는데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개인과 가문에 있어 최고의 명예로 꼽혔다. 이른바 우리나라 역대 학자들의 명예의 전당이다.
하서 김인후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린 학자이자 정치가로 1510년(중종 5)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고 1543년(중종 38)에는 세자시강원 설서,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세자(世子, 훗날 인종)를 가르쳤다. 이 때 김인후는 세자보다 5살 연상으로 스승과 제자이면서 동시에 뜻을 같이 하는 벗으로 서로를 아끼고 흠모하였다.
세자는 김인후에게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했는데 그림을 받고 감동한 김인후는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는 시를 더하여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이 묵죽도는 1568년(선조 1)과 1770년(영조 46)에 목판에 새겨져 현재 필암서원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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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묵죽도 목판(장성 필암서원 소장) | 인종 묵죽도 판화 |
세자 시절부터 성군의 자질을 지녔다고 평가 받던 인종은 1545년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8개월만에 승하(昇遐)하고 낙담한 김인후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인종이 사후 김인후의 애통한 심정은 그가 지은 유소사(有所思)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임(인종)의 나이 바야흐로 삼십이 되어 가는데, 내 나이는 서른이라 여섯이로세.
새로운 기쁨은 반도 다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명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김인후는 인종에 대한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곡을 하고 슬피 울기를 평생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후일 고봉 기대승에게 영향을 주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송강 정철 등 호남의 유력인사들과 교유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1796년 정조는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配享)하라 명하며 “조선 개국 이래 도학, 절의, 문장 어느 하나 빠지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라는 극찬을 하였다.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1590년 세워진 장성의 필암서원은 1659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라도에서 가장 중요한 서원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북구 운암동 운암사거리에서 시작하여 태령동을 거쳐 담양군 봉산면을 연결하는 ‘하서로(河西路)’는 김인후의 호인 ‘하서’에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