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우지 말고 덧그리기
이승현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에 있어 지우고 싶은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바랄 것이다. 그 이야기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찾아왔으면 하는 그런 바람 말이다. 하지만 살아온 삶을 데이터 마냥 골라 삭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덧그리기’라는 차선책이 존재한다. 후회되는 기억이라는 선들을 정리하고 다짐이라는 연필을 들어 덧그리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이때는 내 실수이니 사과해야지 하며 새로운 기억을 그 위에 덮어씌운다. 그렇게 해서 지우고 싶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극복하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 된다.
내가 읽은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지우, 소리, 채운 이 3명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들의 삶의 일부와 그 중 지우고 싶어하는 일들을 지우려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 소설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시점이 전환되며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읽다 보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연결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세 명의 연결된 삶들을 필름을 풀어 인화하듯이 하나하나 펼쳐나간다.
소설 중간에 지우와 소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우는 끝이 있어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소리는 시작이 있어 좋다고 얘기한다. 이 대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라는 지우의 말에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라고 소리가 대답한다. 처음에는 이 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우가 소리가 이야기의 시작이 좋다는 말에 마치 시작하고 끝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전제로 말했기 때문이다. 소리는 그 전제가 맞다는 듯 대답을 하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둘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지우는 자신의 이야기에 끝이 있기를 바라고, 소리는 자신의 이야기가 이미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해당 작품을 읽으면서 지우와 채운에 대해서는 암울한 가정사나 과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하거나 마주하려는 과정을 보여주는게 느껴졌지만, 소리의 경우 비교적 평온하면서 사람의 모순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인상 깊었다. 인간의 모순이라는게 자신한테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돌아보면 모순인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모순을 다수 만들며, 그것들을 인지한 이후에는 최대한 고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나는 약속을 당일에 어기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조차 약속을 어긴 적이 몇 번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사과를 하고 깨닫는 것이 너무 늦은 때 였다면, 똑같은 일로 약속을 어기는 짓을 범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소리라는 인물은 이 작품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다. 소리는 이야기의 시작을 좋아하지만, 가끔 하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발점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두려워한다. 또한 이야기의 끝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고 시작하기만 하는 꿈을 꾸는 것을 찝찝해 한다. 끝이 없고 시작을 원하는 것과는 대비되게 끝이 있기를 바라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소리는 나에게 있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지만 정작 지우개로 지울 일이 생길까 두려워 스케치 조차 머뭇거리는 인물로 다가왔다. 하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고 소리를 비롯한 지우와 채운은 이야기를 채워나가야 할 수 밖에 없다. 두려워하는 일이 생기든 말든 말이다.
지우지 않고 덧그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지우고 싶지만 지우지 못하는 일들은 도화지 위에 진하게 남아있는 연필 자국과 같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3명이 각자 지우고 싶은 그림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는 지를 보여준다. 지우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그림을 곁들인다. 채운은 더 진한 색으로 덧씌우며 지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소리는 다른 그림처럼 보이게 덧그리다가 남은 흔적만큼은 마주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선택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각자의 방법이 스스로에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쩌면 생에 걸쳐 답을 내리지 못할 고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매번 후회하고 지우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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