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채운에게
김효영
소설은 지우, 소리, 채운이라는 세 청소년과 그 가족의 이야기가 각각의 축이 되어 진행되면서 세 아이들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마다의 슬픔과 외로움, 두려움에 짓눌려 있지만 그것들은 이야기의 시작일 뿐 아이들은 어느새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서로가 궁금해진다. 그들에게는 이제 막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한다. 희미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소설은 그 변화에 성장과“조금 다른 이름”(233)을 주고 싶어 한다. 지우와 소리에게는 앞으로의 이야기의 실마리가 얼마간은 생긴 듯하다. 지우는 엄마가 없는 집으로 돌아왔고, 소리는 마치 3년 상을 다 치른 듯 엄마에 대한 애도가 끝나가는 듯하다. 다행이다. 지우와 소리는 만화를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그것들은 어떤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보호막이 되어 주기도 했고, 위안을 주기도 했으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나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다짐은 무력하게 좌절되곤 했지만, 그 끝을 알고 싶은 이야기의 힘에 매혹되어 시작해 보는 용기를 주기도 했다.
이 아이들의 성장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축으로 하면 작품 속 인물들은 ‘오기준’과 다른 인물들로 나눠지는 듯하다. 채운의 아버지 오기준은 언제나 비아냥과 무시로 상처를 주면서도 그 폭언들이 자신이 거짓말을 못한 까닭에 하는 말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 그야말로 거짓말을 못하는 그의 무능은 적나라한 폭력의 표출 말고는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는 파멸의 길로 내달린다. 그는 아내에게 칼을 들이댔고, 그 칼에 찔려 죽었다. 이 비극은 어쩌면 가장 진부한 이야기다. 거짓말을 못하는 오기준은 언제나“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70) 거짓이 부재한 자리에는 누구나 하는 세간의 말들만 수북한 것이다. 거짓말을 못하는 그의 삶은 스스로 교정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는 이야기가 빈곤한 사람이다. 끝장내는 이야기밖에 없는 것이다.
작품 속 거짓말들은 어쩌면 이 비극으로의 내리막길의 제동장치일지 모르겠다. 나약하여 혹은 비겁하여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진실에 곧바로 직입하지 못하는 우리는 거짓말이라는 우회로를 거친다. 이 우회로는 숨을 고르는 시간이 될 수 도 있고, 서로를 보호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거짓말이 진실에 이르는 길을 폐쇄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서로의 지지 속에서 거짓말은 또 하나의 우회로가 될 수도 있다. 한번만 우회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거짓이 불가피하다는 옹호의 말은 아니다. 다만 오기준의 파국을 보면서 당장에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면 잠시 우회하여 자신을 보호할 핑계 하나쯤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일이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 진실은 파헤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자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진실은 똑같은 모습이 아니다.
지우와 소리는 이미 특별한 성취나 성공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진짜 삶’(215) 이라고 믿었던 윤택한 주인공들의 삶이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체념이 아니라, 자신이 특별하지 않음을 수긍하는 자기긍정의 궤도에 들어선 듯하다. 오기준은 어쩌면 ‘진짜 삶’만을 갈망했는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실체가 없는‘진짜 삶’을 사는 그들로부터 밀려나고, 무시당한 울분 속에 살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삶’은 그가 살지 못한 삶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했다. 결혼 전 오기준의 삶에 대한 서술은 전무하지만 그가 조실부모했다는 언급이 있다. 그것은 오기준이 세상이 말하는‘진짜 삶’에만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시작할 거점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성공만이‘진짜 삶’이 아니라고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우와 소리에게도 ‘진짜 삶’ 속에나 있을 이상적인 부모님은 없다. 그러나 엄마가 없지만 아빠가 있고, 엄마 아빠 다 곁에 없지만 혈육이 아닌 선호 아저씨가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데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기준의 아들 오채운에게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채운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엄마와 자신을 지켰다. 엄마를 구했지만 채운은 아버지를 죽였다. 엄마는 채운을 지키려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자수한다. 지금 엄마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엄마는 완고하게 채운의 비밀을 지키려한다. 채운이 진실을 밝힌다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동원한다. 채운은 주저하고 있다. 엄마는 비밀을 지키려 자신의 진실을 꺼낸다. 채운 엄마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했고 그와의 삶을 꿈꿨다. 그 열망이 세 가족을 칼부림의 현장으로 몰아냈을지 모른다고 아들에게 고백한다. 엄마는 채운이 떠날 것을 각오했지만, 이제야 엄마도 채운도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열린 듯하다. 엄마의 선택은 아들을 위한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박태선이라는 여자의 고유한 이야기의 한 매듭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채운에게도 엄마와의 비밀은 엄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는 깨트릴 수 없는 형벌이 아닌 것이다. 채운은 비로소 제 몫의 책임을 질 수 있게 된 듯하다. 더 이상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며 엄마의 희생으로 지켜낸 어린 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셋 중의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한국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생각했던 채운은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묻기 시작했다. 이 시작의 기미는 엄마의 편지를 여러 번 읽고 읽은 채운에게 닿았으면 하는 나의 아주 적극적인 바람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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