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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 장려상 1(지역민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0. 1. 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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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지역민 부문)을 수상한 한길수 님의 독서후기 '나는 그르다'입니다.

 

나는 그르다

 

2019년 독서후기 공모에 참여하기 위해 <당신이 옳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직후, 나는 내가 어떤 제목으로 독후감을 써야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르다’ 이런 제목을 정한 데에는 총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 이 독후감의 전부이다.

 

1. 나는 글렀다.

 

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에 선정된 책, <당신이 옳다>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은 아주 간단하고 폭력적인 판단이었다. 힐링 에세이. 요새 서점에 쏟아지는 힐링 에세이 중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책장을 넘겨보지도 않고 멋대로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목이 ‘당신이 옳다’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던 당신이 옳고, 살던 대로 살기만 하면 되고, 무슨 일이건 그저 잘 될 것이라는 책이 21세기 한국에 넘치고 있다. 독자들의 수준이 낮아진 것도, 작가들의 수준이 낮아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필요의 문제일 뿐이다. 201X년의 대한민국이 힐링 에세이를 삼켜야만 하루를 깨울 수 있을 정도로 각박한 사회기 때문이다. 2019년 10월에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사회를 부수는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기 위해 500만 명이 극장을 찾았다. 2019년 하반기에는 두 명의 젊은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의 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공감하는 부류와 그들처럼 다 가진 이들이 목숨을 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 목숨을 끊은 이들은 이제 없는데 남은 이들의 말들만 세상을 들끓는다. 광장에는 두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 소리를 질렀다. 이 독후감을 작성하는 12월 8일 오후에는 세월호 재조사를 요구하는 1인 시위자에게 일부 노인들이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기사의 하단에서는 소위 ‘틀딱’들은 죽어야 한다는 댓글들과 ‘대깨문’들은 죽어야 한다는 댓글들이 서로 치고 받고 있었다. 죽어야 한다는 말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으니 스스로 죽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읽기도 전에 그런 책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허나 ‘읽는 이에게’를 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내가 성급한 판단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이 옳다>는, 달콤한 말들을 마음에 잔뜩 발라서 혈당을 쑥 올리는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은 ‘잃는 이에게’전하는 책이다. 겉만 보고 쉬이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나는 그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고집을 부렸다.

 

2. 나는 그르다.

 

1장을 다 넘길 때까지도 나는 내가 책을 직접 읽기 전에 정해놓은 독후감의 주제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힐링 에세이에 대한 내 비판적인 입장을, 그대로 이 책에도 투영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2장에서 나는 내 주제를 수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 책은 실용적인 책이다. 작가의 말처럼, 융, 아들러, 프로이트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름을 빌려 어려운 말들을 하는 대신 작가는 300페이지에 걸쳐 심리적CPR을 강의한다. CPR은 왜, 무엇을 위해 하는지를 떠나 갈비뼈가 부러져도 일단 사람을 살리자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충분히 했다. 분석했으니 이제 분석한 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앞에 힘든 사람이 있다. 어떤 이유로, 어떻게 힘든 것인지 분석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이 옳다, 나는 이제야 받아들인다. 나는 그르다.

 

3. 나는 아직 그르다.

 

신이 옳다는 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당신이 그르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그르다. 우리가 타인들에게, 심지어 한 장도 제대로 넘겨보지 않은 책에게 쉽게 범하는 잘못들이 책 내내 가득하다. 우리는 위로를 원하는 상대에게, 그저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상대에게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경계를 침략하고 그들의 자아를 짓밟는 짓을 자주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의 발언권을 빼앗았는가. 불안함과 후회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계몽의 이름, 낮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밤으로 밀어 넣었는가. 이야기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내 과거의 말들을 쓰게 삼킨다. 당신이 옳다는데, 자꾸만 나는 그른 것 같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충조평판을 하다보면 결국 그 말들을 자신에게 건네게 된다. 자신의 아픔과 자신의 슬픔에도 충조평판을 들이미는 것이다. 남을 옭아매며, 스스로를 옭아매고야 마는 것이다. 지금 나처럼 말이다. 허나 당신이 옳다는, 나도 옳다는 말로, 나도 옳다는 말은 당신이 옳다는 말로 널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정혜신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 옳다는 제목의 책을 쓰면서, 자신이 옳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눈앞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냐고, 우리에게 그런 말들을 전하면서 자신 역시 살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옳다는 책을 집어든 어느 누군가는, 그저 자신이 옳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서 끝맺는 책이 아니다. 위로를 원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할 때 자신이 상대에게 하는 말은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라는 말과 이어져, 그 말들은 결국 내 눈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닿았다가 이 책을 읽고 있는 작가의 상대방, 즉 나에게 닿게 된다.

 

허나, 책 한 권 읽는다고 사람이 급격하게 달라질 수 있었다면 세상은 이미 무릉도원이었을 게다.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들을 하기는 참 어렵다. 배우고 배워도 쉽지 않다. 다만 이제 그르다는 것을 알았으니,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는 아직 그르다. 허나 당신이 옳다. 나는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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