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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 우수상 1(재학생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0. 1. 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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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 우수상(재학생 부문)을 수상한 이주은 님의 독서후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입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도망치듯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는 대학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갭이어(gap-year)를 가져보고 싶어서 등과 같은 이유들을 댔지만, 진짜 이유는 ‘그곳에 있으면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였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로 대학교를 가게 되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교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져서, 나는 늘 사람들과 함께였다. 그러나 난 늘 외로웠다. 매일 함께인데 서로에 대한 진실한 앎이나 유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서로의 ‘존재’ 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존재는 그저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확인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곳에서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도 누군가의 수단이 되어주어야만 하고, 내가 필요할 때 그들을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귀’이거나 누군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어야 하는 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누군가를 위하다 보면 나도 자연히 사랑받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역설적이지만 나의 존재를 지워가는 동시에 나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했다.

그 가운데 있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닌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했던 ‘나’가 아프기 시작했다. 극심한 우울감으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본래 ‘믿을 만한 사람’ 이라는 페르소나도,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나’ 가 무엇 때문에 SOS 신호를 보내는지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를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깊은 고독 가운데 침잠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는 문장들을 찾아 읽었다. 때로는 기도도 했다. 늘 혼자여야 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서서히 회복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나를 수단으로 전락시킨 그들이 나쁘고 어리석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막 스무 살 초입을 지났을 뿐이었고 내 주위의 그들도 그랬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타인을 깊게 경험하며 공감해본 적이 없었으리라. 우리는 모두가 존재의 불안을 겪고 있었고, 그것을 어찌하지 못해 가장 즉각적인 방식으로 그 불안과 우울을 없애려 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의 누군가는 그런 방식으로도 충분히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랬기에 ‘당신이 옳다’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깊이 공감했으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우리에게 타인을 공감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공감의 목적은 단순히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궁극의 목적은 ‘내 자신을 위해서’ 이다. 내가 내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타인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타인을 잘 공감해야만 내 자신도 잘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 우울증으로 아픈 사람이 많다. 그만큼 많은 자기계발서나 강의들도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내 자신이 먼저다. 타인은, 내가 내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아낄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바라보고 살펴줄 수 있다고 말이다. 나를 공감하고 타인을 공감하는 것은 마치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당신이 옳다’ 에서도 자기 자신을 잘 보호해야만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자신을 공감하는 것과 타인을 공감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 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곧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공감할 수 없는 타인의 어떤 부분이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어떤 부분일 수도 있다. 서로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 거리두기도 필요하고 각자의 영역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나’와 ‘너’의 깊은 이해는 결코 내가 나 자신을 잘 아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감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나’ 는 누구일까? 더 나아가 우리의 ‘존재’란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정상적으로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해로운가?
언뜻 보면 철학적인 문제여서 쉽게 다루기가 어려운 문제 같지만, ‘당신이 옳다’ 에서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여러 사례들로 인해 몽타주처럼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를 둘러싼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외모, 학력, 능력, 성격이나 기질 등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런 것들이 ‘우리’ 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존재는 가장 내밀한 곳에 감싸져 있다. 다치기 쉬워 가장 섬세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쉽게 보일 수 없는 그 무엇처럼...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 이다. ‘존재’가 옳거나 틀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존재는 그저 존재일 뿐, 옳고 그르다는 기준 자체도 없다. 자식을 존재하게 한 부모도 그 기준을 감히 정할 수 없다. 하지만 존재의 관계에 있어 가장 가깝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부모가 ‘옳고 그름’ 을 정하면 그것을 내면화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상처도 가장 잘 받는다. 실제로 책에 소개된 사례들도 부모와 자식 간의 상처와 공감에 관한 문제들이 많이 다루어졌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자식이 세계의 한 명의 구성원으로 살게 되면서는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부모로부터 존재의 근거가 기인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를 우리가 ‘그때 그때 느끼는 가장 진실한 감정’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감정들은 결코 틀릴 수 없다. 그 모든 감정이 ‘옳다’.
이 ‘감정’ 이라는 것이 기쁘고 밝은 것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부정적인 감정, 우리를 무너뜨리고 한없이 우울하도록, 때로는 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도록 할 때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라는 내 안의 감찰자의 목소리로, 나를 비난하는 타인의 얼굴들로 그런 나의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실제로 타인이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충조평판’ 이라고 일컫는, 충고나 조언, 평가와 판단이라는 이름으로서다. 대개는 나를 정말로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이 ‘충조평판’ 을 한다. 나 또한 그랬던 내 모습을 많이 돌아보았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들 타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기쁨도 옳다. 슬픔도 옳다. 무력감도 옳다. 분노도 옳다.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감정들, 그것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모든 감정들이 ‘내 존재의 신호’다. 자연도 햇빛을 보내고 비를 내리게 하며 바람도 쌩쌩 불게 한다. 하물며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어떤가. 성서의 전도서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고 한다. 울 때와 웃을 때 모두 동일한 나날들이다. 어느 한 쪽이 나쁘다거나 좋다고는 하지 않았다. 많이 웃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인생의 날들인 것이다. 살아왔던 날들에 느꼈던 기쁨 또는 아픔, 앞으로 지을 웃음들, 흘릴 눈물들, 그것은 모두 나이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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