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 최우수상(재학생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0. 1. 29. 11:25

본문

2019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재학생 부문)을 수상한 안태균 님의 독서후기 '타인은 나의 천국이다'입니다.

 

 

타인은 나의 천국이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소설, 『닫힌 방』의 한 대사이다. 본래 그 대사가 쓰인 맥락을 차치하더라도, 이 대사는 오늘날, 드라마와 웹툰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혐오와 갈등이 난무하고 서로 비난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발생하는 각종 병리적 현상과 치솟는 우울증, 자살률 등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런 기형적인 현대사회에 『당신이 옳다』의 저자, ‘정혜신’은 그 남루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존재’, ‘감정’, 그리고 ‘공감’으로 소급시킬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상대방의 ‘존재’에 주목해야 함을 역설한다. 존재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외재적 요인들을 거둬내고 남아있는 것. 그 사람 개인의 역사성과 총체성의 결정이다. 그리고 그 존재의 드러남이 바로 감정이다. 감정은 한 사람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며, 세계에 대한 존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존재의 감정에 주목하여 공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너에게서 나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과정에서, ‘나의 감정’과 ‘나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이 전제돼야 적절한 공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약 2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부처의 가르침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 가르침은 바로 ‘연기’이다. ‘연기’는 “모든 존재는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대의 존재가 나의 존재로써 회복되고, 또 나의 존재로써 침강되기도 한다는 공감의 전제와도 같다. 때문에 이 책은 ‘나는 옳다’라거나, ‘내가 옳다’, 혹은 ‘당신만 옳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존재 자체가 전제되어, 내가 너에게 옳다고 말하고, 네가 나에게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뜬구름 잡는 이상적인 이야기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충조평판’을 유보시킬 것을 요구한다. 사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물론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할 일들도 있지만, 존재의 ‘정동’에 있어서는 다르다. 그것은 참 혹은 거짓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드러날 뿐이며, 바로 그것 자체로 옳다. 아침의 따스한 햇살에서 포근함을 느끼며, 동시에 차가운 눈이 수북이 쌓인 조용한 밤거리에서도 우린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듯한, 바로 그러한 정동들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다. 우리의 정동에 분석적으로 다가간다면, 우리는 단지 정동의 단편만을 볼 뿐이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무엇인가? ‘불안’과 ‘고통’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에 대한 명료한 답변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물질로 환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약물을 주입해, 사랑할 때와 똑같은 체내 화학적 메커니즘을 유도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요’이다. 거기에는 사랑의 대상이, 곧 ‘너’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갖게 되는 감정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수학적 명제처럼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에 있어서의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깝게는 가족부터, 친구, 직장동료,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까지. 문제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존재적 차원의 관계를 맺기 힘들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매번 존재적으로 대응한다면, 나에게 극도의 피로를 줄 뿐이다. 또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나의 공감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대개, 일회적이고 추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서로 동고동락하던 사이도 어느 순간부터 교류가 뜸해지고, 그 사람과의 추억은 단지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한다. 심지어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만일 나는 상대에게 공감할 준비가 돼있지만, 상대는 내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기술했던 ‘관계를 끊는 용기’가 허용되듯, 상대 존재의 지향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을 때, 이를 흘려보낼 수는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무관심이 나의 고통을 초래하기까지 이른다면 어떻게 할까? 그 때에 이르러서는 무작정 나도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끊더라도, 그것은 공감의 관계를 시도하는 과정이 선결돼야 한다. 상대방의 회신이 어떠하든, 나는 상대에게 진솔한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내가 어떤 상대에게도 무관심하다면, 나의 존재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타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을 포기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 나를 매몰시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한 듯하여도, 그와는 별개로 나는 우선적으로 상대에게 공감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긍정적인 것은, 내가 상대에게 공감의 향기를 전해준다면, 분명 상대도 나에게 마음을 펼쳐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연결되며 나를 발견하고, 나의 우주를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말했듯, 상대방에게 상대방 자신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에 귀를 기울여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상대방의 ‘말에 담긴 그 인생의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나도 그 파도와 함께 넘실거릴 수 있다면, 타인은 내게 지옥이 아닌, 타인은 나의 천국이 된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