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냄새가 나는 세탁소
엄그린
동네 세탁소를 찾을 때면 늘 매운 비누 거품 냄새가 코끝을 쨍하게 스친다. 그런데 어쩐지 이곳 메리골드 세탁소는 발을 들이자마자 동백꽃 내음이 은은하게 피어날 것만 같다. 붉은 꽃잎 하나하나가 지은이 놓지 못한 과거임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 그 꽃잎들과 향기가 영원히 그곳에 머물기를 바랐을 테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무렵,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옷자락에 락스가 튀었다. 그 탓에 남색 셔츠에는 희게 표백되어 지워지지 않는 연분홍 얼룩이 남았다. 분홍색 얼룩은 몇 번이고 빨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아픔은 그렇게 마음에 새겨지나보다. 그런 사람들이 아마도 마법의 힘이 있는 메리골드 세탁소로 이끌리게 되는 거겠지. 책장을 넘기는 내내, 세탁소의 순간들을 엿보는 손님 같은 기분으로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이야기는 내게 아직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어떤 이야기는 내가 가진 고민과 닮아서 눈물이 났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지은과 손님들만큼은 아닐지라도 공감하고 위로받았다. 그 안에서도 나는 다른 누구의 이야기보다 지은의 아픔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녀가 마지막이라 마음먹은 이 생에서 비로소 얻게 된 깨달음은‘행복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살면서 한번쯤은 꼭 들어볼 법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내게는 그 깨달음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만큼이나 소소하고 평범한 감상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지은이 깨닫는 순간만큼은 몹시 홀가분하고 감격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하여 제법 오랫동안 생각하다가‘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지은이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요컨대, 지은처럼 아주 긴 시간 스스로를 과거에 고립시킨 채 외로움과 슬픔에 잠겨 현재를 살피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깨달음에 비슷한 감격을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언젠가 매우 인상 깊게 들었던 말 하나를 소개해본다. “꼬집어서 우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과거 크게 흥행했던‘7번 방의 선물’이라는 영화에 대하여 남긴 평론이었다. 나는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은의 행복과 그에 대한 깨달음이 그렇게나 어렵사리 얻을 만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지은이 부모님을 잃어보아야만 얻을 깨달음이었나? 혹은 수십 세기나 되는 시간을 홀로 외롭게 지내보아야만 얻을 깨달음이었나? 만약 거기에 대한 답이‘아니다’라면 지은의 불행한 과거와 홀로 지낸 오랜 외로움은 지나칠 정도로 과하게 부여된 시련일지도 모르겠다. 꼬집힘의 의미가‘해피엔딩의 아름다운 결말이 예비되어있고, 너는 결국 행복해질 테니 아프더라도 백만 년만 좀 참아보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슬프고 가혹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지은이라는 사람을 연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치고 꽤나 시큰둥한 성격이라 생각했었는데, 실은 정이 많아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슬프고 힘든데도 가지고 있는 능력이 멋대로 발휘된 탓에 어쩔 수 없이 위로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마음을 가득 넣어 위로차를 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체온과 피부는 서늘할지언정 마음만큼은 정말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정을 주지 않으려 외로움 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하며 지내온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책 바깥의 독자로서는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것이 달리 없어서, 나는 지은이 생을 마무리하기를 염원한 그곳에서 진심으로 행복해지기를 다만 바랐다.
햇살 냄새가 나는 흰 이불 빨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중 하나이다. 자연이 대가 없이 내어주는 그 뜻 모를 따스함과 포근함을 사랑한다. 그래서 지은이 비로소 곁에 맴돌던 꽃잎들을 놓아 주었을 때, 나는 세탁소 옥상의 새하얘진 셔츠들에서도 한가득 햇살 묻은 따뜻한 냄새가 나기를 바랐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대가 없이 위로해 온 지은에게도 그 따스함이 닿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은에게 해인이라는 사랑이 찾아왔을 때, 그가 햇볕 아래 잘 마른 빨래 같은 냄새가 난다는 사람이어서 괜스레 기뻤다. 소설 속 지은과 현실을 사는 내가 서로 아주 무관한 사람임에도 꼭 그녀에게 나의 행복을 나누어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작은 마을에 노을이 내리고 메리골드 세탁소에 붉은 꽃잎을 실은 바람이 은은하게 스치면, 이제는 햇볕에 잘 널어 말린 따뜻한 빨래 냄새가 자연스레 녹아들 것만 같다. 바람에 날아든 햇살 냄새가 지은이 비로소 찾아낸 행복임을 알기에 그 따스함이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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