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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독서후기 공모전] 최우수상(재학생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4. 2. 2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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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대상도서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3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재학생 부문)을 수상한 신승한 님의 독서후기 '아버지의 해방 그리고 인간의 해방'입니다.

 

아버지의 해방 그리고 인간의 해방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에게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의문을 남긴다. 숱한 통제 불가능한 요인들, 예컨대 외모, 지적 능력, 기호(嗜好) 따위로부터 탄생한 인간은 과연 얼마나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인간은 이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작품과 관련된 다음의 두 가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천착하고 싶은데, 첫째는 이념이고 둘째는 가족이다.

먼저 이념을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포함시킨 것은 작품 속 화자의 동의를 얻지 못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화자는 빨갱이의 딸로 태어난 자신과 달리 적어도 아버지는 빨갱이가 되기를 당신이 선택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생각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실 빨갱이의 딸이 되는 것은 빨갱이가 되는 것과 달리 자유의지가 개입할 일말의 틈조차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을 선택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입장이 현격히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조지 오웰이 말하길 어떤 작가의 글감이라는 것은 그가 속한 시대격동의 시대에는 특히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꼭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이 속한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득이하게 시대의 결정에 맡기게 된다. 그 자신이 그것을 원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화자의 아버지가 냉전의 시대를 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빨갱이가 득세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화자는 빨갱이의 딸이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요컨대, 시대를 맞닥뜨린 인간은 그것의 거대함에 반해 볼품없이 초라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설명이 보충되어야 한다. 만약 이념이라는 것이 시대에 의해 결정된다면, 왜 누군가는 빨갱이가 되고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가? 숙식을 제공받고는 마늘 반 접을 훔쳐간 방물장수의 사정을, 보증을 부탁하고는 야반도주한 먼 친척의 사정을 헤아리는 아버지의 입장은 분명 모든 이에게 공감을 얻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런 아버지의 특수한 입장이, 그로 하여금 한때나마 모든 딱한 민중에게 상냥하다고 여겨졌던 빨갱이가 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대가 이념을 결정한다고 해서 인간마저 결정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념을 이해하는 것은 그 이념을 추구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천진했던 시절 친밀했던 아버지를 빨갱이아버지로부터 되찾기까지 화자에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가? 그런 점에서 이념이란 대단히 가소로운 구석이 있다. 작가의 아버지에게 사회주의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안이었을 뿐이지 무덤까지 가져가야만 하는 질곡은 아니었다. 시대가 이념을 결정한다면 시대의 변화는 이념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따라서 화자의 아버지는, 아마도 작가의 아버지처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이념의 붕괴에도 낙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연민은 이념에 의존해야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가족에 관해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통제 불가능한 요인임을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많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과 비슷하게, 가족이라는 것 또한 그야말로 돌연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면서 몇 번이나 크고 작은 집단에 속하게 되는데, 가족은 그러한 집단 중에서도 가장 먼저 속하게 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집단과 달리 구성원이 되겠다는 의사표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한 번 특별하다. 왜냐하면 가족의 구성원은 일반적으로 혈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이 폐쇄적인 집단임을 의미하는데, 폐쇄적이라는 것은 다음의 의미를 갖는다. 만약 당신이 혈연관계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어려울 것이며, 만약 당신이 혈연관계로 이어졌다면 당신은 그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러나저러나 당신은 지금의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우려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빨갱이의 딸로 태어난 화자는 결코 그 호칭을 본인이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평생 그 호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화자에게 우려스러웠던 일인 바, 화자는 홧김에 작은 아버지와 비슷한 이유로, 그가 걸었던 적이 있는 길을 따라 반내골을 떠나려 했던 것이리라. ‘빨갱이의 딸이라고 해서 자신도 사회주의에 동조해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화자에게는 아버지의 유물론 연설에 넌더리가 나는 일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져 응당 가장 가까워야 할 것처럼 보이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한 순간 그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 같은 집단에 속해있다는 유대감은 때로 다른 구성원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로 이어지고, 가족과 같은 특별한 집단에서는 더욱 그렇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피를 공유한다고 해서, 성이 같다고 해서 가족에게 항상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관계도 결국은 타인을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혈연을 배제한 관계의 객관적 검토를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가족이란 그러한 검토를 거쳤을 때 비로소 피로만 연결된단선적 관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환경에 예속되는 인간이란 참으로 처량하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것을 상기시킨다. 총칼을 들고 당신 나름대로 시대에 저항했던 아버지나, ‘빨갱이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던 화자나 모두 내 생각에는 저마다의 전장에서 분투했다. 그들만 그러할까? 나는 모든 인간에게 저마다의 전장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각각에 주어진, 누구와도 같지 않은 환경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연민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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