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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독서후기 공모전] 우수상 1(재학생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4. 2. 2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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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대상도서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3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우수상(재학생 부문)을 수상한 한원주 님의 독서후기 '우리의 해방일지'입니다.

 

우리의 해방일지

 

-‘오죽하면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 낮, 우연히 만취한 여성이 2층서 투신하려는 걸 목격했다. ‘갈 길이 급한데’,‘행여 잘못 구하다 나까지 다치면 어떡하지’,‘대낮에 이게 웬 난동이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으나,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내 몸은 그 아래서 두 팔 벌려 서 있었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행히 그를 안전히 받아낼 수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활기 넘치는 이 대낮에 술을 마시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창가로 발길을 돌렸을까. 오죽하면 말이다. 그 절박함을 헤아리고 싶은 마음은 119 차량이 우회전하여 시야에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내 발을 묶어 두었다. ‘오죽하면.’ 이 네 글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속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온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는 논리로써도 등장한다. “사램이 오죽흐면 글겄냐.” 남의 빚을 떠안고, 믿었던 이에게 뒤통수를 맞고도 소설 속 아버지는 모름지기 사람이면 상대의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살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무른 흙길을 덮어내는 거친 시멘트 가로마냥, 유감스럽게도 시대는 점점 더 딱딱하고 팍팍해진다. 이제 사람들 입에선 오죽하면보다는 그 반대말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가 더 자주 오르내린다. 동시에 동무’,‘동지같은 이타적이며 말랑한 단어들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신은 이해해 줄 생각이 없지만 이해는 받고 싶어 하는, 사정을 들어줄 귀는 하나도 없지만 본인을 변호할 입은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들. 마음을 후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이들에게는 호구라는 모진 별명이 따라붙고, 제가 친 가지만 아끼는 이기심으로 같은 땅에서 같은 뿌리를 나눈 동지를 사지로 내몬다. 이미 반절뿐인 땅덩어리 위에서 또 서로를 가르고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처참하기까지 하다. 심지어는, 사람이 난간에 매달려있어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하며 지나친다. 그래서 이 생에 적당히 충실한 소시민으로써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냥 오늘 이 찌덥는 더위에 KF94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스치는 뒷모습이 그렇게 숨 막혔던 건 아닐까? 하는.

혹자는 현재를 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이 절정을 달리던 격동의 1950년대, 한국 전쟁의 생채기는 채 아물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우리에게 흉터로서 짙게 남아버렸다. 그 당시 정치인들이나 하던 낙인찍기는 대상이 확대되어 이제 우리 모두 이 낙인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보면 7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있나 싶다.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 그것을 지탱하던 정직함과 곧음은 흐려지고 오늘날 이것은 그저 자극적이고 지독한 편 가르기 싸움을 시작할 명분이 될 뿐이다.

사람을 위한 신념

아버지는 입만 열면 옳은 말 하는 잘나고 똑똑한 양반, 또 한 편으로는 잘나서 빨갱이 짓 하다가 집안 말아먹은 양반이었다.” 사실 나는 그 가혹하다 소문난 연좌제에게 덜미를 잡혔던 이의 손녀다. 여덟 남매 중 가장 총명하여 영광서 광주까지 유학해 학교를 다녔던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바로 그 당사자이다. 정권이 바뀌어 신원 조회 절차가 없어지기 전까지, 응시한 모든 경찰 시험에서 필기 합격, 최종 불합격을 받아내셨던 화려하고 희한한 경력의 소유자이시기도 하다. 그 덕분에 나의 아버지는 장기 백수 타이틀을 가진 가장의 슬하에서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자랐고 아직도 가끔 그 시절 당신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인다.

사회주의, 유물론과 같은 가볍고 순수한 단어가 무거운 역사의 꼬리표를 달게 되었던, 신념일 뿐인 신념일지라도 악행이자 금기였던, 그런 시대였다. 허나 사실 나는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그 가족을 탓하거나 욕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남편의 머나먼 친척 때문에 남편 대신 가장으로 떠밀려 온갖 고생을 한 할머니까지도 말이다. 아무래도 모두가 아는 것 아닐까. 그 국가폭력 속 가려진 진실이 신념을 위한 사람이 아닌 사람을 위한 신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를 두고 생각해 보면 이 나라에선 이제 지워져 버린 그 사상이, 미처 사람까지 지워내지는 못했나 보다 한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먼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하는 소설 속 우리 아버지의 말씀처럼 말이다.

 

- 곧은 사람들이 부러짐 없이 해방되기를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제목 그대로 죽음을 통해 시대의 이데올로기라는 박제로부터 해방을 찾은 아버지, 그리고 잇따라 각자의 해방을 맞은 가족과 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죽음으로써 해방을 눙치는 것이, 그것이 진정 인간의 굴레인 것인가?’ 내 눈에는 그저 소설 속, 사상의 낙인으로 고통받다 우연한 죽음으로써 해방받는인물들의 모습과 용서와 관용이 없는 사회에 지쳐 직접 만든 필연한 죽음으로 스스로를 해방한안타까운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일 뿐이다. 정녕 곧은 사람들이 부러짐 없이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 정말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딱딱하다 못해 날카로운 이 시대, 서로에게 더 많은 아량과 인류애, 더 많은 오죽하면이 필요한 시점이다. 눈처럼 굴려진 오해와 편견이 따뜻한 인류애로 녹아내리기를,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시 관용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긍게 사람이제하는 세상이 온다면 좋겠다고. 앞서 말했듯 이번 생에 적당히 충실한 소시민인 나는 그저 이 한 가지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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