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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역사, 문화, 지리, 인물을 담은 지리지 광주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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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NU Lib newsletter 2025. 1. 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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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광주향교에서 간행한 광주읍지

 

광주읍지(光州邑誌)는 광주의 역사, 지리, 문화, 인물 등 종합정보를 수록한 책이다.

 

본래 광주읍지는 숙종 때 처음 편찬되었고 정조 때 수정된 것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879(고종 16) 옛 읍지의 체제를 모방하여 완성한 것이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도서관 소장본은 고종 때 판본에서 변경되거나 폐지된 내용을 수정하고 새롭게 적용된 것(신증:新增)들을 반영하여 1925년 광주향교에서 간행하였다.

 

읍지의 첫 단락은 건치연혁(建置沿革)으로 백제무진주(百濟武珍州)’로 시작된다. 무진주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동성왕조이다. “동성왕 28년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왕이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르렀다는 내용인데 광주읍지의 기록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순수 차선(車線) 숫자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로인 무진대로(武珍大路)는 백제시대 광주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지방행정조직으로 주()를 설치한 적이 없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무진주는 통일신라 때 부르던 명칭을 백제시대까지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의 이두식 발음이 ’, ‘임을 미루어볼 때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땅을 무돌또는 무들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이 많은 들판이라는 뜻으로 물이 많아 놓사가 번성한 풍요로운 고장이었고 이 곳에 우뚝 솟은 산은 무돌뫼라 불렀다. ‘무돌뫼가 한자로 정착된 것이 무등산이고 무등산의 둘레길을 무돌길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940년 이 땅을 광주(光州)라는 고쳐부르면서 광주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광주는 해양현( 海陽縣), 화평부(化平府) 등으로 불리었고 고려 공민왕 11년에는 다시 무진주(茂珍州)로 고쳤다(이 때는 고려 혜종의 이름인 를 피하기 위하여 무성할 를 사용하였다). 그후 공민왕 22년 다시 광주로 복귀하면서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광주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광주(光州)가 무진군(茂珍郡)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무진이라는 지명이 잠시 등장할 때가 있었다. 1430년(세종 12) 광주사람 노홍준이 광주목사(光州牧使)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지방관은 임금을 대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단순폭행죄가 아니라 기군망상죄에 해당하는 큰 사건이었다. 이에 세종은 광주를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하고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속하도록 하였다.

 

한사람의 잘못으로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는 1451년(문종 원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된다. 20여 년만에 이름을 되찾게 된 기쁨에 당시 광주에 짓고 있는 루()를 희경루(喜慶樓)라 이름지었다. 희경은 함희상경(咸喜相慶: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함)의 줄임말로 신숙주(申叔舟)는 희경루기(喜慶樓記)에서 '동방에서 제일(甲於東方)'이라고 칭하였다.

 

읍지에 따르면 희경루는 객사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적고 있다. 객사 북쪽은 지금의 충장우체국 근처이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희경루는 2023년 자리를 옮겨 광추천변 언덕 위에 중간되면서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1925년까지 광주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광주읍지는 번역본과 함께 도서관 2층에서 전시됩니다.

 

 

광주읍지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2층 로비

- 전시기간: 2025. 1. 2. ~ 1. 31.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일요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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