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식인!
학문을 배우는 것도 어렵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평화로운 세상이 아닌 전란의 시대라면 더욱 더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험란한 역사의 파도 앞에 분연히 몸을 일으킨 의병장들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 문신, 학자이인 김천일은 호남지역에서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김천일의 친가는 담양 창평이지만 외가가 있는 나주에서 태어났다. 명종 때 유학자 일재 이항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과 교유하며 초야에 묻혀지냈다.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지평, 임실현감, 담양부사,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나주에 은거하였다.
1592년 역사를 뒤흔든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김천일의 여생은 평온하게 마무리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천일의 나이는 59세였다. 김천일은 평소 몸이 허약하여 잔병치레가 잦았는데 일본군이 침략하여 선조가 파천을 하고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제봉 고경명, 회재 박광옥 등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고 나주에서 의병 300여 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수원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루었고 강화도로 진을 옮겨 한양을 탈환할 기회를 엿보기도 하였다. 1593년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크게 패한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나자 적군을 추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받고 남부지역으로 내려갔다.
당시 진주성은 일본군의 대공세가 예정되어 있어 진주성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호남의 울타리이다"라며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6월 22일 1차 진주성 전투에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일본군은 10만에 가까운 대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진주성 안에는 관군과 의병을 포함하여 약 3천여 명의 병력만이 남아 있었다.
외부 지원이 끊어지고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일본군의 맹공을 굳건히 버텨냈으나 6월 29일이 동문이 부서지면서 결국 일본군이 성 안으로 난입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김전일은 장남 김상건과 함께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고경명의 아들), 양산숙 등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북쪽을 향하여 절을 두 번 올리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때 좌찬성,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나주 정렬사, 진주 창렬사 등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집인 <건재선생문집>은 후손들이 김천일이 남긴 시문을 모아 1802년 교정하여 간행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893년(고종 30)년 처음 간행되었다.
김천일이 태어난 나주 동신대학교 부근에서 출발하여 광주 광산구 본덕동 본덕IC를 잇는 '건재로'는 김천일의 호인 건재에서 유래한 것이다.
※ 건재선생문집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2층 로비
- 전시기간: 2025. 2. 3. ~ 2. 28.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일요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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