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큰 전란이 일어났을 때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2명이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모두 전사한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믿기 어려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문인이었던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다.
1533년(중종 28) 광주에서 태어난 고경명은 1558년(명종 13)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을 거쳤고 1563년(명종 18) 울산군수를 끝으로 고향인 광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고경명은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식영정사선(息影停四仙)'이라고 불렀다. 고경명은 고향에 은거한 약 20여 년의 기간 중 무등산 일대와 담양, 화순의 명소를 찾아 많은 시를 남겼다. 1574년(선조 7)에는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 임훈과 함께 무등산에 올라 그 소회를 글로 남겼는데 이 책이 <유서서록(遊瑞石錄)>이다. 문장이 유려하고 문학적 가치가 높아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이 남긴 무등산 기행문 중 으뜸으로 꼽히는 글로 제봉집에 포함되어 있고 별도의 책으로도 간행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에 발탁되어 20여 년 간의 은거생활을 마치고 다시 관직을 맡았고 종계변무주청사 김계휘와 함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경명의 나이가 59세였으니 이듬해 일어난 전란이 아니었다면 고경명은 고향에서 편안히 남은 여생을 마쳤을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6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맏아들 고종후, 둘째아들 고인후와 함께 6,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다. 이 때 각 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보낸 격문(檄文)을 보내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고경명 휘하에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격문을 말 위에서 작성했다고 해서 ‘마상격문’이라고도 부른다.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한 고경명은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고 훗날을 기약하라는 주변의 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싸우다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 안영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의병과 병량을 모으기 위하여 여산 본진에 있던 고종후는 전투가 끝나자 아버지와 아우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루고 이듬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최경회와 함꼐 남강에 투신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1년(선조 34) 호남의 유생들이 고종후 3부자와 유팽로, 안여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기려 무등산 자락에 사당을 건립하였고 1603년(선조 36)에 ‘포충(褒忠)’이라는 액호를 받은 호남 유일의 사액(賜額)사당이다.
광주광역시는 고경명 등 3부자의 드높은 의기를 기려 광주 동구 학동 남광주역에서 북구 중흥동 광주역을 잇는 도로를 ‘제봉로(霽峰路)’라고 부르고 있다.
고경명은 우리 학교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고명경의 손자인 월봉 고부천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황제로부터 매화 화분 하나를 받아 고향인 담양 유촌에 심었다. 1918년 이 나무를 분주(分株)하여 육성한 것을 1972년 전남대에 기증하였는데 이 나무가 매년 민주마루 앞에서 화사한 자태와 그윽한 매화향기로 방문객을 불러모으는 '전남대 홍매'이다.
※ 2025년 이달의 고서는 고문헌 기획전 <도로 위의 위인들(광주 도로명의 유래)>와 연계됩니다. 도서관 5층 고문헌 자료실을 방문하시면 충장로, 금남로, 설죽로 등 우리 주변의 익숙한 도로명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고문헌을 통하여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제봉집, 유서석록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2층 로비
- 전시기간: 2025. 4. 1. ~ 4. 30.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일요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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