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수록된 면앙정가(俛仰亭歌)로 친숙한 송순(宋純)은 1493년(성종 24) 전라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자연을 예찬한 시인으로 더 유명하지만 사실 송순은 오랜 기간 관직에 있으며 정2품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까지 지낸 고위 관리였다.
송순은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가 숙청당하자 기묘별시는 조광조 일파의 농단이라며 시험 합격을 취소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송순의 답안만은 출제와 내용이 맞았다 하여 다른 의견이 없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승문원권지부정자, 세자시강원설서와 사간원정언을 지내며 순조롭게 관직생활을 하던 송순은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잡자 고향인 담양으로 돌아와 면앙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송순이 관직을 그만두고 얼마 뒤 김안로는 사림(士林), 대간(大諫)들과 협력하여 반대파를 공격하고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이 때 송순은 관직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송순은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廢位)를 꾀하다 사사(賜死)된 후에야 다시 관직에 나서는데 논어(論語)에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고 도(道)가 없으면 은거해야한다’하였으니 공자의 말을 잘 실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대사간(大司諫) 등 요직(要職)을 거쳤고 1547년(명종 2)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한성부판윤과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끝으로 50년간의 관직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였다.
1579년(선조 12) 제자인 정철의 제안으로 송순의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가 열렸다. 송순의 회방연은 조선시대 첫 사례로 선조(宣祖)가 이 소식을 듣고 처음 과거에 합격한 것과 같이 어사화(御賜花)와 술을 내려주었다. 정철, 고경명, 임제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대나무 가마에 송순을 태우고 앞장섰으며 그 뒤로 전라감사를 비롯한 각 고을 수령과 사람들이 따르며 모두 감탄하고 부러워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장수에 관한 경사는 회갑(回甲, 탄생60주년), 회근(回巹, 결혼60주년), 회방(回榜)이 있었다. 이 중 회방연은 과거에 합격하고 장수한 관리만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드문 사례였고 특히 문과회방은 조선시대 통틀어 단 4명만이 누린 영광이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국가에서 물품과 비용을 지급하여 잔치를 열고 새로 합격교지를 하사하는 등 국가적인 행사로 제도화되었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송순은 면앙정가 등 자연을 예찬하는 많은 시가를 남겨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정극인(丁克仁)과 함께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송순이 주도한 면앙정가단(俛仰亭歌團)에서는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소세양, 양산보 등 당대 일류 문인들이 서로 교유하며 호남 제일의 가단을 형성하였다.
송순의 시가는 제자인 정철의 시가문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송순이 남긴 500여 편의 시가는 1829년(순조 29) 송득칠 등이 편찬한 <면앙집>에 남아 전한다. 필사본은 7권 4책, 목판본은 4권 2책인데 도서관 소장본은 7권 4책의 필사본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후문에서 시작하여 무등도서관을 지나 북구 풍향동까지 연결되는 ‘면앙로(俛仰路)’는 송순의 호인 ‘면앙정’에서 유래하였다.
※ 도서관 냉난방기 교체공사로 인하여 7월과 8월 이달의 고서 오프라인 전시는 쉬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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