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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축척을 적용하여 제작한 동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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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NU Lib newsletter 2020. 10. 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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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지도 조선전도와 팔도분도 중 전라도 부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지도를 사용했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던 지도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지도와 사뭇 다르다. 조선 후기 민간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책에 실린 동람도(東覽圖)를 기반으로 하는 소형 목판본과 필사본 지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런 지도들은 지면이나 소재의 크기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축척이 무시되어 실제 지형과 매우 다르며,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은 일()자 형태로 매우 오류가 심했다.

 

동람도 계통의 소형 필사본 중 조선전도와 전라도 부분. 지도의 왜곡이 심하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정상기는 이런 지도들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축척을 도입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데, 후세 학자들은 이를 동국지도라 명명했다.

 

동국지도는 백리척(百里尺)‘이라는 척도를 도입하여 100리를 1(), 10리를 1()으로 계산했다. 지도에 축척이 도입됨에 따라 비로소 지도를 보고 실제 거리를 계산 할 수 있어 지도의 효용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축척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경기충청을 1폭에 그렸고, 남북으로 긴 함경도는 남도와 북도로 나누어 2폭으로 그린 것이 정상기식(鄭尙驥式) 지도의 큰 특징이다. 함경북도의 여백에는 이전 지도들이 가졌던 결점을 지적하고, 동국지도의 제작 동기와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각 도를 색으로 나누어 구분하였고, 산과 하천, 성읍 등을 각각의 색으로 표기하여 한 눈에 지리 현상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육로와 해로를 자세하게 표시하여 교통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할 만한 점이다.

 

동국지도는 영조에게 찬탄을 받아 홍문관(弘文館)과 비변사(備邊司)에 비치되었고, 18세기와 19세기 관과 민간에서 가장 많이 필사되어 유통되었다. 현재 20여 종이 남아 있으며, 크게 원본 계통과 수정본 계통으로 구분된다.

 

동국지도의 출현 이후 제작되는 대부분의 지도들은 동국지도의 형식을 따르게 된다. 동국지도에서 시작된 조선 후기 소축척지도의 유행은 100여 년 뒤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탄생하는 토대가 된다.

 

도서관 소장본은 원본계통의 필사본으로 함경북도 지도 여백에 발문(跋文)과 함께 경자년에 제작되었다는 필사기가 있다. 처음 지도가 제작된 이후 영조 이후 경자년은 1780, 1840, 1900년이 있다. 지도의 지명 변화를 살펴볼 때 1776년 니성(尼城)으로 바뀌는 충청도 논산이 바뀐 지명인 니성으로 표기되어있고, 1789년 화성(華城)으로 바뀌는 수원(水原)은 바뀌기 이전 지명인 수원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 지도가 1776년과 1789년 사이의 경자년, 178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말미에는 서울에서 어렵게 구하여 많은 비용이 들여 제작을 했으니, 나의 후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글귀가 있다. 지도를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고 싶어 했던 제작자의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동국지도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5층 고문헌 자료실

- 전시기간: 2020. 11. 2. ~ 11. 30.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점심시간 제외:12:0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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