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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독서후기 공모전] 우수상 1(지역민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1. 2. 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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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대상도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편]

2020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우수상(지역민 부문)을 수상한 주정은 님의 독서후기 '우주와 만나는 암호 해독서'입니다.

 

우주와 만나는 암호 해독서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한국인으로서 교육을 받고 살아왔다. 국민의 3대 의무 중에 교육의 의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서 한다.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도 물론 중요하지만, 교육의 의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남들의 눈이 중요한 한국에서 교육은 큰 의미가 있다. 그 틀 안에서 살아가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그런데 과연 나는 정말 반만년 역사를 살아온 한국인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국사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한국인으로서 특징이 많지 않다. 우리의 전통보다는 서양의 전통을 우리의 것인 양 생각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작가는 그것을 이원론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한국인으로 살아왔는데 사실은 서양인의 사고방식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동양의 일원론이 한국을 제외한 다른 동양에서는 지금도 잘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판단 중지라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과연 인간은 판단 중지를 할 수 있을까. AI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으로 판단중지를 하고 바라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색안경을 착용한 상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책은 우주에서 시작한다. 맨 처음의 시작, 우주와 ‘나’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새벽에 읽었는데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듯한 경험이었다. 사실은 이미 하나인데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생각은 이미 나 자신이 이원론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찬란한 우주와 만나기 위한 암호 해독 서라고 말하고 싶다. 결론은 아직 나는 그 우주를 만나지 못했다.

머나먼 우주, 멀리서 온 별빛을 바라보며 밤 산책을 했다. 빛공해와 별자리에 대한 무지로 금성, 목성, 토성,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 자리 정도만 알아보는 나의 관찰은 아마도 몇만 년 전인지 몇천 년 전인지 모를 처음 별을 올려다보며 우주에 대한 생각을 한 인간부터 현재까지 우주는 인류와 연결되어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처럼 인류는 우주를 보는 관찰자로서 살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4권의 책을 구매했다. <우파니샤드> 1, 2권과 <순수 이성 비판> 1, 2권이 그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를 가까이 두고 읽었다고 하는 문장 때문에 샀다. 학창 시절 쇼펜하우어 팬이었던 나는 그 한 문장으로 우파니샤드를 사서 낭독한다. 오움.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며 아트만이 바로 브라흐만이다고 했다. 범아일여. ‘나’는 누구냐고 이 책은 묻는다. 이 질문에 나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일까.

 

  중학교 때 과목 중 하나였던 ‘도덕’이 이처럼 무거운 의미였음을 깨달았다. 도는 우주고 덕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혼란한 세상을 떠나는 노자와 혼란한 세상에 들어가는 공자 중에 나는 어떤 쪽일까 생각해본다. 젊었을 때는 세상에 들어가고 늙어서는 세상에 나오는 편이지 않을까.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하시는 분들의 연령대와 그걸 보는 시청자들의 연령대가 높은 이유는 이 복잡한 세상 훌훌 털어내고 자연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대리만족이 아닐까. <우파니샤드>에도 노년엔 숲으로 들어간다 했는데 자연에 그 진리가 있기 때문일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라는 개념이 난해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와 같은 걸까. 그리고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이 해탈에서 멀어진다는 문장을 보며 노자가 공자에게 한 말도 떠올랐다. 진정으로 덕이 있는 군자는 어리석어 보이는데 공자는 너무 잘나 보인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웠던 서양철학이 나온다. <우파니샤드>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서양철학에 나오는 단어들은 모두 익숙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단군신화 빼고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더 익숙한 현대의 상황은 일제강점기에 의한 우리나라 전통의 단절 때문일까. 그저 전 세계적인 현대 시대의 흐름일까.

 

  칸트의 새벽 4시 55분에 일어나고, 오후 3시 30분에 산책을 하고, 오후 10시쯤 잠이 드는 루틴까지는 따라 할 수도 있겠지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앞에서 <순수이성비판> 1, 2권을 샀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알고 싶어서 샀다. 누군가 ‘신경을 쇠약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평했다고 했는데 동의한다. 읽고는 있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독서의 중도 현상이라고 칭하고 싶다. 읽은 것도 아니고 읽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아직 있다.

 

  예수의 원래 가르침은 착하게 살면 사후에 복을 받는 게 포인트가 아니고 나의 삶과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게 포인트였다는 것은 소승불교에서 개인의 해탈의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적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씀을 적고,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의 말씀을 적고, 붓다의 제자들은 붓다의 말씀을 적어서 남겼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가 배울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을 직접 썼는데 왜 공자는 직접 쓰지 않았을까. 그들의 말보다 제자들의 해석이 더해져서 새로운 창작이 되었고, 그 내용이 사람들이 원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일까. 진리라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일까.

 

  작가는 고전을 읽기 어려운 이유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고전을 잘 읽을 수 있을까 하고 기대를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는 것과 깨달은 것은 다르다. 작가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을 하고 아주 친절히 답을 해준다. 조용히 나를 만날 시간이다. 나에게 남은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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