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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독서후기 공모전] 최우수상 (재학생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1. 2. 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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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대상도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편]

2020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재학생 부문)을 수상한 김동윤 님의 독서후기 '냉소주의를 넘어'입니다.

 

냉소주의를 넘어

 

지금 우리는 인간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는 중이다.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경제는 촉망 받는 산업이었고, 여행사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누빌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련의 사태를 지나며 한때 미래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이제는 일상생활마저 제약되는 상황이다. 세계는 다시 우리에게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이 책이 필요한 시기이다.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세계를 담는 나의 의식을 재정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붕괴하고 재건되는 지금을 기회로 삼아, 우리를 옭아매던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인식의 외연을 확장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500페이지가 넘지만 의외로 그 내용은 간명하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일원론이다. 일원론은 자아와 세계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라는 이론이다. 내 주위에 존재하는 세계는 나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 속에서 존재한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나의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다. , 관찰자가 없으면 세계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일원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일원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몇 천 년 전부터 위대한 스승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것이다. 범아일여, 도덕일치, 일체유심조, 관념론. 사상의 종류에 따라 그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같은 것들이다.

 

  동양의 사상이 일원론으로부터 출발한 것과는 달리 서양 사상은 이원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서양 철학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세계를 뜻하며 유동적이고 불안한 현실 세계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여 세계는 양분되었다. 이데아와 현실, 자연과 인간, 야만인과 문명인, 이성과 감성.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심지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이원론은 산업화와 문명 개발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서구 사회가 빠른 경제적, 물질적 발전을 이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양 철학은 한계에 이르렀고, 결국 칸트의 관념론에 이르러 일원론으로 귀결되었다.

 

  현대인에게는 이원론이 익숙하다. 현대인은 서구 사회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일원론은 아직, ‘네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식의 자기계발 문구로만 사용되는 경향이 짙다. 또한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침묵 속에서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현대 사회에는 내면의 시간을 갖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다. TV, 스마트폰, SNS... 이것들은 시청각을 강하게 자극하여 말초적인 쾌감을 제공했고, 우리는 그것에 점점 적응해 갔다. 1분 내외의 짧은 영상을 취급하는 틱톡과 같은 어플이 인기를 끄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여기에 진지한 태도를 쿨하지 못한 것으로 상정하여 진지충과 같은 멸칭 안에 가두어버리는 사회 풍토가 중첩되어 사람들이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결국 자아와 세계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는 그냥 배부르고 할 일 없으니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이다(p.36)’로 치부되기에 이른다. 이 문장은 책의 서두에서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말초적인 답이라고 언급된 바 있다.

 

  사람들은 점점 자발적으로 왜소한 삶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나의 인식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해일처럼 범람하는 콘텐츠를 소비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세계관 안에 안주하는 삶. 이러한 삶의 태도는 굳이 고통을 감내하고 용기를 내면서까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꼭 생채기를 입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의문에서 나온다. 이 새롭게 등장한 회의주의, 또는 냉소주의는 현 출판계에서 소위 힐링 에세이유행이 시작된 이유이기도 하며, 때로는 세련된 언어로 포장되어 젊은 세대가 586 세대를 위시로 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이유는 책의 맨 앞쪽, 파잔 의식이 언급된 프롤로그에서 찾을 수 있다. 파잔 의식은 야생 코끼리를 포획하여 묶어놓은 뒤 저항하지 않을 때까지 구타하고 굶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살아남은 코끼리는 관광객을 등에 태우는,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의식의 시행자들 역시, 처음부터 파잔 의식에 찬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와 국가는 가난한 그들에게 너의 가족을 위하여 질문하지 말라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성과 중심주의의 논리에 만신창이가 된 현대인들. 그리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태도. 어쩐지 파잔 의식이 연상되지 않는가? 이 새로운 회의주의에 대한 공감이 많아지고 쿨한모습으로 묘사되기까지 하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영혼이 어쩌면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하고, 너른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고. 우리는 분명히 파잔 의식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괴된 영혼을 재건하고, 치유하며 우리 손으로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마치 위대한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코로나19가 무너뜨린 일상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눈을 더 뚜렷하게 만들었다. 외부의 모든 것이 잠시 정지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이제는 정말로, 중요한 질문들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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