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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궁중연회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조선왕실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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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NU Lib newsletter 2021. 6. 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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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명정전에서 열린 외진찬의 전경을 그린 그림

1829(순조 29) 순조(純祖)40세 생신과 즉위 30주년을 기념하여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殿)과 자경전(慈慶殿)에서 열린 궁중연회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의궤이다. 진연도감(進宴都監)에서 금속활자 정리자(整理字)를 사용하여 34책으로 간행하였는데, 국왕과 관료 중심의 잔치인 외연(外宴)과 왕실 여인들의 행사인 내연(內宴)이 함께 수록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창경궁 자경전에서 열린 내진찬을 그린 그림. 외진찬에 비교 규모가 작다.

 

진찬의궤(進饌儀軌)에 기록된 궁중연회(宮中宴會)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이었던 효명세자(孝明世子)였다. 의궤의 주인공인 순조는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홍경래의 난과 외척인 안동김씨의 정치세력화 등으로 재위 후반부에 이르면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27(순조 27) 순조는 자신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왕세자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조선시대 양위(讓位)나 대리청정의 이야기가 나오면 신하들이 명을 거두어달라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선례(先例)가 많았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경우에는 순조가 내린 왕세자의 서무 대리에 관한 비망기(備忘記)를 보고 신하들이 한결같이 기쁘게 찬양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처럼 많은 사람의 기대 속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김씨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정치세력의 균형을 맞추는 등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매년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다. 조선시대 궁중연회는 규모에 따라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등으로 나뉜다. 1827년에는 순조의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고, 1828년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40세 생일을 기념하는 진작이 열렸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위해 진작이 열린 경우는 많지만, 의궤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효명세자가 주관한 이 두 번의 진작은 모두 의궤가 제작되어 현재 전하고 있다.

 

1829년에는 순조가 왕위에 등극한지 30년이 되는 동시에 순조의 나이 40세인 해를 기념하여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연회는 2월 창경궁의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과 순원왕후의 거처인 자경전(慈慶殿)에서 열었다. 순조의 생일이 있는 6월에는 조금 작은 규모의 연회를 개최했다.

 

2월에 열린 일련의 연회에 들어간 재정은 호조(戶曹)와 왕실(王室)에서 나누어 부담하여 모두 19,372()이나 소모되었다. 효명세자가 많은 비용과 노력을 소모하며 여러 차례 궁중연회를 연 것은 지극한 효심을 드러내는 한편 성대한 잔치를 개최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임으로써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에 눌려 있던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회에 사용된 각종 물품들 내진찬 때 사용된 궁중무용 중 몽금척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복들

 

문학과 예술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효명세자는 궁주연회에 쓰이는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특히 연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궁주무용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더욱 크고 화려하게 직접 만들었다. 각 연회의 의식절차, 준비과정, 참여한 사람들과 각종 물품, 그리고 그에 따른 경비 등은 󰡔진찬의궤󰡕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회에 사용된 지당도와 죽간자 의궤를 바탕으로 복원된 지당도의 모습

일제강점기와 현대화를 겪으며 궁중문화의 맥이 끊어진 현실 속에서 의궤에 수록된 정밀한 그림과 상세한 기록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궁중예술의 복원과 재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가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효명세자는 다음해인 1830(순조 31) 갑작스럽게 각혈을 한 뒤에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 많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때 효명세자의 나이는 불과 22세였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대리청정 기간 동안 보여줬던 효명세자의 모습을 생각하면 효명세자가 순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순조가 붕어(崩御)한 뒤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憲宗)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순조의 마지막 희망 이었던 효명세자가 죽고 어린 헌종이 등극하면서 잠시 주춤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되었고 조선은 점점 더 파국(破局)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진찬의궤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5층 고문헌 자료실

- 전시기간: 2021. 6. 1. ~ 6. 30.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점심시간 제외:12:0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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