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관선송(留餘觀選誦)!
왕실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던 도침(搗砧: 여러 장의 종이를 다듬질해서 매끄럽게 하는 가공방법)된 장지(壯紙)에 해서체로 미려하게 써내려간 글씨가 일품이다. 도침된 장지를 사용하였기에 한 책의 무게가 다른 2~3책의 무게만큼 무겁다.
표지 제목에 쓰인 ‘유여관(留餘觀)’은 조선 정조(正祖) 때 문신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호(號)이다. 표지를 넘기면 각 책마다 맹자정선(孟子精選), 장씨략선(莊氏略選), 태사공문선(太史公文選)의 소제목이 있다. 소제목 아래에는 윤행임인(尹行恁印)이라는 장서인(藏書印)이 있어 이 책이 윤행임이 소장하고 있던 책임을 알 수 있다.
윤행임인 尹行恁印 |
본문의 인명(人名)과 중요한 구절에는 비점(批點)을 찍었고 구절이 끝난 뒤에는 붉은 색 구결(口訣)을 달았다. 본문의 뒤에는 유향(劉向),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정이(程頤), 소식(蘇軾), 주희(朱熹) 등의 역대 학자들이 쓴 글을 덧붙였다.
윤행임은 1782년(정조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奎章閣)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었다. 정조의 명으로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등을 편찬하였고, 정조가 직접 석재라는 호를 내릴 정도로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정조가 승하(昇遐)할 때 윤행임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여 정조의 사후 도승지(都承旨)‧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역임하며 정조가 미처 이루지 못한 유업(遺業)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순조(純祖) 즉위 초 수렴청정을 맡았던 정순왕후와 노론(魯論) 벽파(僻派)가 남인(南人) 시파(時派)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에 휘말려 전라도 강진(康津)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가 40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그 뒤 헌종(憲宗) 때 신원(伸冤)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으며 그의 글씨가 충남 아산의 <영괴대비(靈槐臺碑)>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된 <윤극신묘표(尹克新墓表)>가 전하고 있다.
※ 유여관선송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5층 고문헌 자료실
- 전시기간: 2021. 9. 1. ~ 9. 30.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점심시간 제외:12:0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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