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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곡성에서 만권댁으로 유명했던 곡성정씨집안 장서 이천격양집

유용한 정보(Tips)

by CNU Lib newsletter 2021. 11. 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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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내용의 장서인이 날인된 이천격양집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이 책은 송나라의 학자, 시인인 소옹(邵雍, 1011~1077)의 시집으로 이색(李穡), 서거정(徐居正),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많은 학자들의 사랑을 받아 조선시대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도서관 소장본은 20권 5책의 목판본으로 표지를 넘기면 첫 장에 다양한 크기의 장서인(藏書印) 8개가 날인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 3개와 위의 5개는 색상이 달라 다른 시기에 날인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3개는 노첨(魯瞻)이란 호를 가진 수원백씨 백봉진(白奉鎭)의 장서인인데 아마도 이 책의 원주인으로 추정된다.

 


수원(水原) 노첨(魯瞻) 백봉진인(白奉鎭印)

 

나머지 5개는 백봉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장서인이다. 고서를 연구하다 보면 새 주인이 원소유자의 장서인을 도려내고 새 종이를 붙인 뒤 자신의 장서인을 날인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새 주인은 백봉진의 장서인을 그대로 두고 윗 여백에 자신의 도장을 날인했으니 책을 아끼는 사람이 틀림없으리라.

 

바로 위 장서인은 ‘곡성군관동정율헌장(谷城郡館洞丁栗軒藏)’인데 전라도 곡성군 관동에 살던 정씨 성을 가진 율헌(栗軒)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의 도장이다. 그렇다면 율헌은 누구일까? 그 다음 도장에서 우리는 이 책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곡성군관동정율헌장(谷城郡館洞丁栗軒藏) 정일우묵용실장서인(丁日宇默室藏書印)

 

‘정일우묵용실장서인(丁日宇默室藏書印)’.

 

이 도장은 구한말 곡성에서 장서가로 유명했던 율헌 정일우(丁日宇)의 장서인이다. 곡성지역 향리(鄕吏)였던 이 집안의 장서는 정일우의 6대조인 정우성(丁佑星)부터 수집을 시작하여 정일우 때 가세(家勢)가 크게 늘어 서울, 중국 등에서 많은 책을 사들이면서 만권댁(萬卷宅)으로 불릴 정도로 방대한 장서를 소장하게 된다.

 

서문 말미에 적인 장서기에 따르면 이 책도 대대로 소장되었던 책이 아니라 병자(丙子, 1906)년 정일우의 아들인 정순태, 해태가 상경하여 사왔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모인 장서들은 정일우의 서재인 ‘묵용실(黙容室)’ 이름을 따서 ‘묵용실장서’라 부르는데, 다양한 크기와 내용을 새겨 넣은 많은 장서인을 날인한 것이 묵용실장서의 큰 특징이다. 책의 소장자를 알려주는 장서인은 보통 본관, 이름, 별호, 서재명 등을 사용하는데 간혹 좋은 문구(文句)나 후손을 경계하는 말을 새겨 넣기도 한다.

 

내 자손은
(이 책을)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라
치생과 독서는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자손대대로 선대의 뜻을 잘 이어받아 서생문호하라

 

묵용실장서인 옆의 도장은 ‘丁日宇吾子孫永世勿失’은 후손이 이 책들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경계하는 말이고, 그 위의 두 장서인 또한 평소 생활함에 있어 독서의 중요함을 강조한 경구(警句)이다.

 

이 책에는 날인되어 있지 않지만 ‘자손대대로 공동 보존하여 판매하지 말 것’, ‘반드시 독서하는 이에게 전할 것’ 같은 내용을 담은 도장도 사용했다.

 

만권에 달한다는 많은 책에 일일이 자신의 장서인을 찍고 잘 보존해 주기를 후손에게 경계하는 뜻을 남겼으니 정일우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사랑했던 정일우는 1923년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자 둘째아들 정봉태를 불러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당부를 남긴다. 정봉태는 부친의 말을 정리하여 연활자로 인쇄하고 각 책의 표지에 붙이는데, 이것이 묵용실장서 표지마다 붙어 있는 ‘묵용재소장만권서사‘이다.

 

‘여러 자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이 글에는 정씨가문 장서 형성의 유래와 장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느낀 즐거움, 그리고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정일우의 유언이 담겨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구가 이 많은 장서가 그냥 보관만 하고 있게 된다면 벌레나 쥐에 손상당하거나 도적을 맞거나 마침내 밥 세끼 축내는 무리에게 탕진하게 되니 내 바램은 책을 그런 불행에 빠뜨리지 않고 세간에 독서를 좋아하는 무리에게 공유하는 것이다.

 

병석에 누운 정일우의 구술을 둘째아들 정봉태가 정리하여 인쇄하였는데, 하단에는 자식과 손자들의 각오와 이름이 적혀 있다.

 

정일우의 아들과 손자들은 정일우의 높은 뜻을 받들어 1932년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장서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는데 이 때 기증된 책 만해도 728종 9,458책이나 된다. 만권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많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곡성정씨가문의 책은 정말 만권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자랑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동아일보에 실릴 정도로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밖에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도 묵용실장서가 일부 소장되어 있다.

 

묵용실장서는 전남대학교 설립 전 대부분 서울지역으로 기증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 전남대 도서관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장서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천격양집 이외에 서파집편형완(西坡緝編衡翫) 3책이 발견되어 총 2종 8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책을 소중하게 간직해온 곡성 정씨 가문의 장서형성과정과 관리, 그리고 후세 학문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기증까지 진정으로 책을 사랑한 애서가 가문 사람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 이천격양집 전시 안내

- 장소: 중앙도서관 5층 고문헌 자료실

- 전시기간: 2021. 11. 1. ~ 11. 30.

- 관람시간: 9:00~18:00(토요일, 점심시간 제외:12:0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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