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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대학자 노사 기정진의 친필 편지첩 노사간첩(蘆沙簡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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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NU Lib newsletter 2023. 7. 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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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헌종7)에 전라도 장성에서 강학한 노사 기정진이 당시 창평 장전에서 살던 친구 이규형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규형이 아내 상산김씨(商山金氏)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사가 장전 부근을 지나다가 위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조선 후기 유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편지를 모은 간찰첩이다.

 

기정진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 녹문 임성주, 한주 이진상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사람으로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나 18세 때 아버지의 고향인 장성으로 이주하였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인 기정진에게는 기이한 탄생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기정진의 아버지 기재우(奇在祐)는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순창에 있는 큰 아버지에게 의탁하였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에게 효를 행하기 위하여 순창 복흥의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이라는 혈을 찾아 부모를 모셨다. '황앵탁목혈'은 이 곳에 묘를 쓰면 3대손이 복을 받는다는 명당인데 특히 한 쪽 눈이 없는 아이가 태어나야 명당의 복이 제대로 발복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정진은 태어나서 7일만에 하녀의 잘 못으로 한 쪽 눈이 찔려 실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풍수와 맞아 떨어져 대학자가 되었다는 설화이다. 

 

그래서 였을까? 기정진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였는데 7세 때 한시를 짓는 천재성을 드러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831(순조 31)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 대과를 치루지는 않았다. 뒤에 유일(遺逸: 은거한 선비를 찾아 추천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되어 40여 차례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표적 논쟁이었던 '사칠논쟁''호락논쟁'에 대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주장하였고 600여 명이 넘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 노사학파를 이루었다. '호락논쟁'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납량사의>, 이이의 주기론을 반박한 <외필>, 제자들 문답을 기록한 <답문류편> 등 조선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1862년(철종 13)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삼정의 문란을 지적하는 상소를 작성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올리지 못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내정을 바로잡고 군비를 강화하면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내용의 상소 <병인소>를 올려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렇듯 그의 학문은 현실에 동떨어진 공리공론이 아니라 철학적 이론을 현실에 반영하는 실천적 경향이 강했다. 손자인 기우만, 종손인 기삼연을 비롯하여 노사학파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집 <노사집>은 1883년(고종 20) 손자인 기우만과 제자들이 주도하여 목록 2권과 문집 22권을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1898년(광무 2) 부록을 더하여 중간하였다. 1902년(고종 39)에는 경상도 단성 신안정사에서 목판본으로 삼간본이 간행되었다.

 

1851년(철종2) 2월 7일에 기정진이 제자 이최선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규형의 부음을 접한 노사가 천식이 심하여 제문을 지어 조문할 시기를 정하지 못했기에 먼저 위문편지를 보내 애도를 표한다고 하였다.

 

도서관 소장 간찰첩에 수록된 편지들은 창평 장전(長田,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에 거주하고 있던 친구 이규형(李奎亨, 1797~1851)과 이규형의 아들이자 기정진의 제자인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1883)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편지의 내용은 일상에서 펼쳐지는 생활 주변의 정경과 안부, 상례, 시사에 이르기까지 내밀한 감정의 교류와 소통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문집인 <노사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노사 연구의 새로운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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