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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독서후기 공모전] 장려상 1(시도민 부문)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24. 2. 2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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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대상도서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3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시도민 부문)을 수상한 김정미 님의 독서후기 '마음속 매듭을 바라보며'입니다.

 

마음속 매듭을 바라보며

 

내 마음속 구석에 꽉 묶인 매듭이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다가 별안간 그 매듭이 생각나서 마음속을 뒤적여 보았다. 제법 시간이 지났으니 좀 헐거워졌으려나. 슬쩍 들어보니 여전히 꽉 묶여 있다. 어디가 시작점인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고상욱 씨와 그의 딸을 떠올린다.

 

사람 냄새 나는 다큐멘터리들이 있다. 슬며시 웃음이 나고 묵직한 울림을 주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웃음과 울림이 동시에 전해진다. 어느 쪽이 더 비중이 높은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고, 책을 몇 번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다. 키득거리며 웃기도 여러 번, 두근거리는 심장에 가만히 손을 얹기도 여러 번이었던 까닭이다. 전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3>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마치 거기에서 본 것 같다. ‘고상욱 씨 장례식이라는 제목을 달고 방영했을까? ‘빨갱이의 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연거푸 생각해보니 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지만, 시선은 한결같이 아버지를 향해 있으니 아무래도 고상욱 씨라는 이름을 꼭 넣어야 할 것만 같다.

 

, 그렇다면 주인공 고상욱 씨는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수많은 에피소드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건 그가 빨치산이었다는 것. 더불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혁명가라는 것이다. 혁명가 앞에 실패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납득이 되는 삶을 살았다. 빨치산인 아내와는 교집합이 있기는 하나 겹쳐진 동그라미가 아주 크지 않아 보이고, 그런 부모를 마뜩잖게 여기는 딸 아리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로 인해 풍비박산이 된 가족들도 주변 인물로 등장한다. 주변 인물이라고 했지만 시점을 옮기면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이야기를 가진 가족들이다. 아홉 살이던 작은아버지는 교실로 들이닥쳐서 고상욱이를 본 사람을 찾는 군인에게 자랑스럽게 손을 들고 외쳤다.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그날 총부리에 할아버지는 주검이 되었고, 반내골은 불탔다. 큰집 사촌인 길수오빠는 또 어떤가. 육사에 합격하고도 작은아버지가 빨갱이라는 게 밝혀서 입학이 취소되었다. 고상욱 씨가 빨갱이가 아니었다면 휘몰아치지 않았을 화마는 가족들을 집어삼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겁의 시간들을 살아낸 사람들은 술꾼이 되었고 위암 말기 환자가 되었다.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될 수 없을진대 누군가가 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바닥에 내던졌다면 오롯이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으리라. 그토록 미웠던 사람이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나라면 그의 장례식에 조문을 갈 수 있었을까. 너무나도 슬픈 질문에 술꾼과 위암 말기 환자는 찾아와 명복을 빌었다. 온 마음을 다해 미워했지만 미움은 감정의 단편일 뿐, 다른 수많은 감정들이 자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장례식이 하루이틀사흘 시간을 쌓아가는 동안, 고상욱 씨를 향해 다양한 감정을 품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시계방 박선생, 열일곱살 담배친구 소녀, 아리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 장례식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잔잔하고도 세차게 흘러가고, 물결을 바라보던 아리는 마침내 대척점에 있던 아버지와 나란히 서게 된다.

 

고상욱 씨 장례식장에 머무는 동안 초등학교 과학시간이 생각났다. 물과 기름으로 하는 과학실험,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초등학생 시선으로 본 물과 기름은 참 신기했다. 팔이 빠질 정도로 세차게 흔들면 하나가 되는 듯하다가도 금세 명확하게 둘로 나뉜다. 가로로 죽 그어놓은 선에 서로가 닿을 새라 멀찍이 밀어내는 모습이 마치 마술 같아서 집에 돌아와 주방에 있는 식용유를 한 통 다 썼던 기억도 난다. 분리된 물과 기름을 구경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기어코 합치고서야 과학시간은 끝이 났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여 겉도는 사이를 뜻하는 물과 기름이 섞이게 하는 물질은 계면활성제 비눗물이었다. 별거 아니라 여겼던 비눗물이 어울리지 못하던 둘을 끝내 하나로 만드는 모습에 열 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역사 소설이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재미난 블랙코미디 요소가 잔뜩 들어간 이야기라고 부른다. 묵직하다는 사람도, 가볍다는 사람도 있다. 소설이 아니라 수필이라는 말도 한다. 해석을 이토록 자유롭게 독자에게 맡긴 책이 있었던가. 좌우로 갈라진 우리나라에서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매개로 한데 섞이길 바라면 너무 큰 욕심일까. “어차피 빨치산이잖아!” 쯧쯧 혀를 찰 누군가에게도 분명 이 책이 비눗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매듭이 있다. 과거형이기도 하고, 현재형이기도 하다. 처음 매듭이 생겼을 때는 풀어보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러다가 더 이상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싹둑 잘라버리고 다시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지 되뇐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와 고백하건데 나 역시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쩌지도 못하고 매듭을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다. 아리가 자전거를 함께 탄 작은아버지의 쉰내를 정겹고도 역겨운 듯 느꼈다는 말이 너무나 공감돼 눈물이 났다. 확실한 건 매듭을 대하는 내 마음이 고상욱 씨와 가족, 이웃, 동지들을 만나며 달라졌다는 것이다. 빨치산 아버지를 둔 딸, 짝은성을 둔 작은아버지가 그랬듯 이제는 엉켜버린 매듭 속에 갇힌 가족과 나를 마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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