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기에, 굵은 나이테
권아진
“가장 좋아하는 책 장르가 뭐야”
“추리소설이요”
대중매체의 가장 흔한 소재는 사랑이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고 이성, 가족, 애완동물 등 다양한 대상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하지만 난 그런 작품을 잘 보지 않는다. 법정 드라마, 스릴러, 스포츠와 관련된 작품을 좋아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추리소설을 가장 좋아한다. 요즘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를 정주행 중이다. 그러다가 국내소설 책장에 고개를 돌렸다. 차분한 배경에 은은하지만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에 이끌려 책을 집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순삭’이었다. 책을 펼치고 단번에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내가 왜 이런 힐링소설을 두고 머리를 쓰는 추리소설을 좋아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마음의 얼룩을 세탁해주는 곳이라는 설정은 현실성이 없다.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져지지도 않는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런 마음의 얼룩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옷에 튄 빨간 양념처럼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얼룩으로 인해 자책하고, 후회하고, 포기하는 등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그건 모두가 그렇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재하처럼, 연인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연희처럼 누구나 얼룩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얼룩이 있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의 얼룩이기에 깨끗하게 지울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세탁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시도’가 ‘마음 세탁소’에 발을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희삼촌처럼 대부분 마음 세탁소의 문을 열기를 어려워한다. 지은은 이를 알고 문을 연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 노력한다. “이곳에 들어오면 마음을 회복해서 돌아가는 거야. 마음의 얼룩을 세탁해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마음 나이테를 만들어 돌아가면 좋겠어.”라는 말을 건네고, 진심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차를 대접한다. 사실 나이테는 나무의 생장 속도가 계절에 따라 달라서 형성되는 것이다. 근데 생장 속도가 너무 느리면, 즉 생장환경이 열악하면 생장하지 못해서 나이테도 나타나지 못한다. 지은의 말에서 ‘마음 나이테’를 만들어서 돌아가라는 건 지금까지 더디게 성장하고, 버겁게 마음의 여유를 확보해왔을테지만, 마음의 얼룩을 지움으로써 여유롭게 마음의 여유공간을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뚜렷한 나이테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세탁소에 입장하는게 어려운 것처럼, 지은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의 얼룩을 지워주는 것보다 세탁소를 열겠다고 마음먹는게 더 어려운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지은이 처음 분식집에 들어섰던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지은은 분식집 김밥이 엄청 맛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그 건물을 사들이고, 세탁소를 운영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재하와 연희에 따르면 그 김밥은 정말 맛이 없었다. 이 부분에서 드라마 <라켓소년단>이 떠올랐다. 주인공 해강이가 카레를 만들었는데 엄청 맛이 없었다. 하지만 양이 많아서 젊은 부부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부부는 도시에서 시골로 귀농한 듯 보였지만, 사실은 사람 적은 조용한 곳에서 삶을 마감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천장에 줄을 매달고 마지막 식사인 듯 해강이가 준 카레를 먹는데, 배드민턴부 친구들은 맛없다고 한술만에 뱉었던 카레를 눈물을 흘리며 맛있다며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다잡았다. 그리고 쌀쌀맞게 굴던 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음의 얼룩이 삶의 얼룩이 되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할 때, 누군가가 내밀어준 따뜻한 마음으로 인해 삶에 대한 의지를 다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에서, 지은은 단순히 마음의 얼룩을 지워준게 아니라, 삶의 얼룩을 지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나이테를 잘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게 아니라, 나이테를 만드는 나무가 땅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운게 아닐까?
물론 연자씨처럼 마음의 얼룩이 삶의 얼룩으로 번졌지만, 세탁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은이 옷을 다리고 “하지만 아시죠? 옷을 입으면 다시 주름이 생기는 거”라고 말했는데 이 부분에서 머리가 띵 울렸다. 얼룩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지워도 입다 보면 얼룩이 다시 생길 수 있다. 밥을 먹다가 반찬이 젓가락에서 탈출할 수도 있고, 지나가던 차가 흙탕물을 튀길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세탁하면 된다. 마음의 얼룩도 마찬가지이다. 계속 살아가다 보면 주름이 지고 얼룩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내 삶이다. 불규칙하게 생성된 나이테를 지니고 가지 뻗은 나무처럼, 빳빳하게 쇼윈도에 걸린 옷이 아닌 생활감 있는 옷을 입는 것. 그게 내 삶이다. 연자씨가 살아 있으니 살고 싶어지고 살고 싶어지니 사는게 행복하다고 한 것처럼 살아 있기 때문에 주름진 옷도, 얼룩진 옷도, 깨끗한 옷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니가 내린 잣대들은 너에게 더 엄격하단 걸 니 삶 속의 굵은 나이테 그 또한 너의 일부 너이기에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자 버리기엔 우리 인생은 길어 미로 속에서 난 믿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는 거야’
방탄소년단의 Anser : Love Myself라는 곡의 일부이다. 이 곡을 재하에게, 연희에게, 연자씨에게, 영희삼촌에게, 은별에게, 해인에게 그리고 지은과 봄이에게 들려주고 싶다. 네 자신을 사랑하라고. 네 삶은 아름답다고. 살아있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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