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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독서후기 공모전 수상작_최우수상

미래를 여는 책/서평

by CNU Lib newsletter 2017. 12. 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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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백승민(신문방송학과) 학생의 독서후기 '슬픔이 읽어 투명해질 때' 입니다.

 

 

 

슬픔이 익어 투명해질 때

- 더럽혀지더라도 더럽혀질 수 없는 생()의 존엄성에 관하여

 

모든 감정의 끝에는 슬픔이 있다. 기쁨·분노·사랑·욕심이 그 극단에 이르면 인간은 결국 슬퍼진다. 한강의 문장은 이러한 극단으로서의 슬픔을 깎아 만든다. 순간의 들뜬 감정이 슬픔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그때 비로소 쓴다. 그러니 그녀에게 정말 어려운 일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이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1994󰡔붉은 닻󰡕으로 등단한 작가는 매번 그렇게 버티고 버텼다가 슬픔이 투명해지는 순간 펜을 들어왔다.

투명해진 슬픔은 애이불비(哀而不悲)하다. 슬프지 않은 소설이 없으나 눈물이 떨어지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내리는 하얀 눈송이나 창문에 낀 성에가 눈물을 대신한다. 둔한 눈에 그것은 때로 서사 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로 보일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낭독이다.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보라. 그러면 그녀가 버텨낸 시간과 투명해진 슬픔이 입 속에 고이기 시작한다. 소설 󰡔󰡕의 목차에는 흰 것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우선 그것부터 하나하나 발음해보는 것이다.

안개, , 레이스 커튼, 성에…….”하고 혀를 굴리다보면 우리 주변에 이렇게나 많은 흰 것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환기하게 된다. 또 흰 것을 통해 순수함이외에도 많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16년 출간된 󰡔󰡕은 작가의 개인사가 담긴 소설이다. 이번 소설을 통해 그녀는 두 시간도 안 되는 찰나의 삶을 살다간 언니 대신 태어났다는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이번에도 그녀의 감정은 투명한 슬픔으로 숙성된 상태이므로 단순한 비애를 넘어선다. 어쩌면 47년이 걸렸을지도 모를 쓰지 않고 버티는 과정이 그녀가 본 흰 것들을 통해 드러난다.

작가가 흰 것들에 대해 감각하는 방식은 속죄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그녀는 그것을 재건의 과정이라 부르며,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렇게 찰나의 생을 살다 간 언니의 삶을 대신 살아간다는 의식을 덤덤히 고백하고 자주 앓는 자신의 삶을 보듬는다. 또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조국에게도 속죄를 촉구한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온전히 애도 받지 못하는 고국의 현실에 대해 말하며, 그들의 나비 같은 넋이 왔다 갈 수 있도록 도시 한복판에 애도의 장을 만들어 기리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묻는다.

이를 통해 작가에게 있어 죄책감은 잘못을 탓하기 위해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라 잘못 이후의 책임 의식을 촉구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소설 속 그녀는 죄책감 속에 갇히지 않고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바로 언니가 자신을 대신해 살아간다고 가정하며, 그런 언니를 통해 세상의 흰 것들을 다시금 바라보는 작업이다.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는 죽음을 넘어선 공감,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지를 드러낸 행동이다. 그렇게 소설은 그녀가 언니의 혼과 합일하여 흰 것들을 보고 마침내 언니를 보내며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라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렇듯 (소설의 주요 줄거리인) 흰 것들에 대해 감각하는 행위는 속죄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그녀에게 흰 돌은 침묵의 가치를 환기시켜 주고, 흰 나비는 억울하게 죽은 넋을 위로하는 마음을 품게 한다. 또 아침에 일어나면 느껴지는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흰 천으로부터 당신은 귀한 사람이며,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 추운 겨울에 내뱉는 하얀 입김은 내 안에 있는 따듯한 것들을 증명하며,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한다.

모든 흰 것들을 거친 후 마침내 그녀는 속죄의 과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세 가지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거짓말을 그만둘 것.” 이는 자신과 타인을 속이지 말자는 뜻이다. 둘째,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즉 자신과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셋째,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다시 말해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행동하자는 말이다. 종합해보면, 속이거나 외면하지 않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속죄와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결론이다. 이를 그녀는 흰 쌀밥을 먹으며 깨닫는다.

더럽혀지더라도 오직 흰 것들을 말하려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려는 자세다. 즉 절망이나 회의에 빠져 산 채로 죽어버린 인간이 되지 말자는 이야기를 󰡔소년이 온다󰡕에 이어 󰡔󰡕에서도 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은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절실하게 안고 간다. 핵심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인간에 대한 회의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부여잡는 자세에 있다. 그녀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희망이 생긴다는 신념을 항상 견지한다.

잠시 눈을 감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뻔했던 사건들을 차례차례 떠올려본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자행한 인권유린 및 강제인력수탈의 만행들,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매도해 민간인을 학살하고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는 군부 독재 정부, 그밖에도 일상에 내재하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들……. 투명해진 슬픔을 가진 자들은 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날카로운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둔한 마음을 가진 자는 이들의 아픔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감정 내지는 곧 잊혀질 역사쯤으로 취급한다. 그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의 자세다. 투명해진 슬픔을 천천히 낭독해보는 태도다. 더 이상 숨기거나 덮는 것만으로는 인간에 대한 존엄을 회복할 수 없다.

소설 속 언니처럼 이생을 스치고 가버리는 자가 아니라면 완전히 흰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 삶은 평생 검은 자국을 묻히고 닦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자국은 닦아야 할 오물이 될 수도 있고, 지우고 싶지 않은 소중한 역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평생 흰 종이 같은 삶 위에 검은 연필로 무언가를 써내려가야 한다. 완전히 흰 것이 아니면 배척하는 자세나 검은 역사를 부인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는 각성해야 한다.

명암이 그림에 입체감을 부여하듯 흰 것 위에 검은 것을 겹쳐야 개인의 삶과 사회가 다채로워질 수 있다. 작가는 덧붙인다. 이제 거짓말을 그만두고, 장막을 걷으라고. 그리고 그 위에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을 위해 흰 초를 밝혀달라고. 흰 것을 말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작가, 한강. 나는 그녀가 웃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꼬옥 안아주고 싶다. 더럽혀지더라도 더럽혀질 수 없는 흰 마음을 믿자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낭독해본다. 그녀의 혼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슬픔이 익어 투명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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